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사실적 기록에 더한 풍부한 감상

  이번호부터 기존 ‘Air@Arts’ 칼럼과 병행해 ‘길 따라 책 따라’를 신설, 고전부터 현대에 이르는 유명 기행문학을 소개한다. 다양한 풍물과 깊이 있는 정취가 담긴 명사들의 기행문을 따라 또 다른 여행의 즐거움을 느껴보자.

  달 밝은 밤에 고향길 바라보니
  뜬구름 너울너울 그곳으로 돌아가네.
  구름에 실어 편지라도 부치려는데
  바람이 거세어 돌아보지도 않네.
  이 시는 신라의 고승 혜초(慧超)가 지금부터 1300년 전, 저 멀리 인도와 서역 지방을 두루 여행하다 고향을 생각하며 읊은 시이다. 오늘에 읽어도 가슴이 뭉클하고 눈시울이 촉촉해지는 감동이 전해온다.
  비행기와 열차 자동차가 걷는 수고를 덜어주는 오늘에는 우리는 너무도 편안하게 지구 곳곳을 여행할 수 있다. 그러나 혜초가 경험했던 당시의 여행은 한마디로 고행(苦行)이었다. 7, 8년이나 되는 오랜 세월 동안 꼬박 제 발로 걸으며, 목숨을 걸고 거친 자연과 낯선 사람들과 싸워야 했던 고난의 길이었기에 고향 땅과 고향 사람들을 그리는 정은 마음에 사무칠 수밖에 없었으리라.

‘5천축국’에 다녀온 기록
  혜초는 신라에서 태어나 당나라에서 활동한 고승이다. 8세기가 시작될 때 신라 불교는 원효와 의상과 같은 뛰어난 사상가들의 업적을 토대로 큰 발전을 이뤄 성덕왕대의 빛나는 불교문화를 이룩하고 있었다. 그러나 혜초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깊은 공부를 위해 당나라에 유학했다. 그리고 당시 중국에서 큰 관심의 대상이던 밀교(密敎)에 심취했다. 7세기 후반기부터 전파된 것으로, 주술적인 의례 등을 통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종교세계를 펼치는 것이었다.
  이후 혜초는 불교의 본고장 인도에 구법(求法) 여행을 다녀왔고, 733년에 인도 밀교의 대가 금강지 삼장에게서 법을 전해 받고 경전을 번역하는 일에도 참가했다. 780년에는 밀교의 성지인 중국 오대산에서 경전을 해설했다고 한다.
  이 기록들로 미뤄 보면 혜초는 700년경에 태어나 일찍이 중국에 건너가 720년부터 728년경까지 인도와 중앙아시아 일대를 여행한 후 밀교의 고승으로서 많은 활동을 하다가 780년 이후에 당나라에서 입적한 것으로 보인다.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5천축국’ 곧 인도에 다녀온 기록이라는 뜻이다. 당시 인도는 다섯 지방, 즉 동천축, 서천축, 남천축, 북천축, 중앙천축으로 나뉘어 있었다.
  혜초는 720년경에 당나라 서울 장안을 떠나 동남쪽 해안의 광주로 가서 배를 타고 인도로 향했다. 당시 인도로 가는 구법승들은 험난한 사막을 지나야 하는 육로보다 해로를 선호했다.
  계절풍을 이용한 항해로 광주에서 한 달만에 수마트라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얼마간 머물며 더운 기후와 언어를 익힌 후 동인도로 상륙했다.

8년간 인도와 중앙아시아 두루 여행
  혜초는 먼저 여행의 가장 중요한 목표인 갠지스(Ganges) 강 근처의 불교 유적지를 순례했다. 현존하는 왕오천축국전은 바이샬리에 대한 기록으로 시작한다. 이어 석가모니가 세상을 뜬 곳인 쿠쉬나가라를 순례하고 석가모니가 처음으로 설법한 바라나시에 갔다가 두 달이 걸려 중인도에 도착했다. 그런데 불교 유적이 많은 중인도에 대한 서술이 적다. 이로 보면 현재 남아 있는 왕오천축국전은 앞쪽이 상당 부분 떨어져 나간 것으로 보인다.
  중인도에서 남인도까지 3개월이 걸렸고, 남인도에서 다시 2개월이 걸려 서인도에 이르렀다. 서인도에서 3개월이 걸려 인더스 강 상류의 펀잡지방에 이르고, 여기서 1개월이 걸려 지금의 파키스탄 영토에 들어가 탁실라를 지나 카슈미르 지방에 들어갔다.
  카슈미르에서 큰산을 넘어 한 달 만에 불교미술이 크게 발달했던 간다라에 이르니 인도에 상륙한 지 5년째 되는 때였다. 간다라에서 북쪽으로 우디야나 등을 지나고 서쪽으로 남파에 이르니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이었다. 그곳에서 계빈 등을 거쳐 바미얀에 이르고 다시 토하라에 들어갔다. 그리고 와칸을 거쳐 세계의 지붕이라 일컫는 파미르에 이르렀다.
  여기를 지나면 중국 땅이다. 타클라마칸 사막과 천산산맥 사이로 난 서역북도를 따라 카슈가르와 쿠차를 지났다. 계속해서 고창을 지나 서역과 당나라의 문화가 만나 천불동의 화려한 예술을 꽃피운 둔황을 거쳤다. 그리고 728년경에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에 도착함으로써 혜초의 8년 동안의 긴 여정은 마무리됐다.

여행기이자 종합적인 풍물 보고서
  왕오천축국전에는 이러한 여정과, 여행한 지방을 보고 느낀 점이나 전해들은 내용이 소상히 기록돼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인도와 중앙아시아 각 지역의 불교계 현황과 지역간의 거리를 비롯한 지리 환경, 그리고 풍습과 산물이나 언어 또는 정치 상황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나 있다.
  그 한 예로 중인도에 대한 기록을 보자.
  ‘길에는 도적이 많은데 물건을 빼앗고 곧 놓아주며 해치거나 죽이지 않는다. 만약 물건을 아끼다가는 다치는 수도 있다. 토지가 매우 따뜻하여 온갖 풀이 항상 푸르고 서리나 눈은 없다. 먹는 것으로는 쌀과 떡과 보릿가루와 우유 등이 있고, 간장은 없으며 소금을 쓴다. 흙으로 만든 냄비에 밥을 지어 먹고 쇠솥은 없다.’
  이 책은 풍부한 시정(詩情)이 담긴 기행문학일 뿐만 아니라, 현대의 우리들로 하여금 당시 상황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가질 수 있게 해주는 사실적이고 종합적인 역사서인 것이다.
  왕오천축국전은 1천900년에, 중국 문물과 서양 문물이 만나는 비단길의 길목이었던 둔황(敦煌)에서 프랑스인 펠리오(Pelliot)에 의해 발견됐다. 앞뒤가 떨어져 나가서 227행이 남아 있는, 높이 28.5센티미터, 길이 358.6센티미터의 두루말이 사본(寫本) 형태였다. 온전한 모습이 아닌 것이 아쉽긴 하지만 8세기의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모습을 전해주는 유일한 기록으로서 커다란 가치를 지니며, 현재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혜초가 활동했을 당시 중국에 유학한 신라의 구도승은 180명에 이르고, 이중에 다시 인도에 갔던 이는 15명이었다. 그리고 이들 중 여행길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이 10명이고, 중국이나 신라에 돌아온 사람은 5명뿐이었다.
  이처럼 목숨을 내건 험난한 여정이었지만, 혜초는 진리를 찾고자 하는 뜨거운 열정과, 미지의 세계를 향한 호기심과 동경으로 이 모든 역경을 이겨냈다. 그리고 낯선 땅과 낯선 사람에 대한 다양한 풍경과 순례자로서의 감회를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까지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정병삼 / 숙명여대 한국사학과 교수>